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우리가 자신을 체험으로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또 한번 "나는 누구인가?"를 기억해 내고 그런 자신을 창조할 있도록 말이다.
신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포함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갖고자 하는 모든것이 내게 있지만, 그것을 이미 갖고 있음을 내가 알 때 까지는 그것을 갖는 체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앎이 체험을 앞선다. 그러나 세상의 반이 그것을 거꾸로 알고 있다.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알기위해서는 마치 정말 아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먼저, 행복 - 이미 안다, 현명한, 자비의 상태 - 상태가 되고 그 되어있는 상태에서 시작을 해야한다. 존재하고 행위하고 고유하게 된다. 그런 듯이 행동하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자신에게 끌어올것이다.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남에게 주어라."
어떤것을 내어주는 행동 자체가 내어주기 위해 그것을 갖는 체험을 스스로 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 갖고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없이다. 즉, 나는 그것을 가진게 틀림없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 하며,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을 내어줄 수 없음을 알게될 것이다.
단, 만약 무언가를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기위한 계략으로 남에게 준다면, 마음은 이것을 알아채고 자신이 지금 이것을 갖추고 있지 않음을 인지하게 되어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즉, 끌어오려던것을 밀쳐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도의 최고 형태는 생각의 조절이다.
오직 바른것만 생각하고 부정과 어둡속에 머물지 말라. 상황이 아무리 암울한 순간이라도 그런 순간 일수록 완벽함을 기억하고 오직 감사만을 표현하다. 그리고 다음 번에 드러내고 싶은 완벽함이 무엇일지만을 상상하라. 이 공식 속에 차분함이 있고 평온함, 깨달음 속에 기쁨이 있다.
어둠을 보아라. 그러나, 저주는 하지마라. 어둠을 비추는 빛이되어 그것을 바꾸어라.
어둠속의 사람들은 나의 빛으로 밝아지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모두가 참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
배워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 뿐이다.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배움이 있다 차분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기억을 해내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의 남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는다. 물론 그 또한 진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삶에서 언제나 자기 앞에 세가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1. 우리는 조절되지 않은 생각들이 그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2. 창조력을 지닌 자기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 있다.
3. 집단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상속에 성장이 있고 "있는 그대로"에 대한 새로운 발상속에 진화가 촉진된다.
직관은 영혼의 귀이다.
영혼이야 말로 유일하게 생명의 가장 희미한 진동들까지 감지하고 해석하기게 충분한 예민함을 감지하는 도구이다.
인식을 바꿀 때 생각이 바뀌고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기대할 수있는 모든 결화가 이미 우리를 위해 거기에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을 인식하고 아는 것 뿐이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한, 어떤것도 고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무대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것이다. 죽음 역시 환상님을 이해할 때,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니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즐겨라. 단, 우리의 존재는 환상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것을 열어주는 열되가 되게 하라.
에너지가 합쳐질 때, 그것을 매우 응축되지만, 이 응충점에서 멀어질수록 에너지는 더 많이 흩어진다. 공기는 더 엷어지고 오라는 흐려진다. 에너지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다가 에너지가 다른 곳에서 별개의 단위(이분법) 처럼 보이는 것을 다시 한번 이루기 위해 "함께 뭉쳐져" 합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별개인 두개의 단위가 나타나지만, 사실 분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 저절로 중요한 것은 없다.
완전히 혼자 힘으로 물질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수는 "아버지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만물의 아버지는 순수사고(절대사랑)이다.
어떻게 해야 자각에 머물수 있는가?
나의 자각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 개종시켜서가 아니라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서 말이다. 사랑의 발단으로 타인에게 주는 것이 곧 나에게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 중에는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기에...
자신이 내어주는 것을 잃을 수는 없다.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혀끝에 우주의 창조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믿는대로 그렇게 될 것이다. 시작은 신이고 끝은 행동이다.
행동은 창조하는 신, 체험된 신이다.
창조하는 존재는 뭔가를 놓고 미래의 어떤 순간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있다. 창조하는 존재는 자신의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삶은 "갖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 진리를 계속해서 잊고있다. 그렇게 하려면 타인을 용서해야한다. 특히, 내가 가지려 했던 것을 나에게 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남들에게 더 많이 모으게 할 수록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더 모으게 된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하기가 더 어렵다. 누군가를 지배 할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어지만,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과정이 영을 물질성으로 육화시킨다.
그 에너지는 말 그대로 자신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파동(진동)을 바꾸는 것으로 한다. 전부인 것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 개별화된 영혼 - 혼이 하는 것이다.
존재들의 공동체가 함께 있음에 대해 알 때까지 절대로 성스러운 교류를 체험할 수 없다. 진정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 선물이 된다. 이런게 삶의 진짜 선물이다.
내 삶(나) =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삶(고진재).
우리가 서로를 마주 할 때 그 모든것은 선물 이었다.
우리는 예리한 관찰력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고진재(우주의 고도로 진화한 존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보고 도움이 되는 것을 한다. 인간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고진재들은 넉넉함을 깨닫고 있으며, 넉넉함을 창조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의식하는 고진재들은 천연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 즉, "충분히 있음"의 상태로 있으니 불충분함에서 오는 불안과 경쟁, 분노,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다. 만물의 통일성 보다 분리성을 믿는 것은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관찰력을 사용하고 사고체계를 바꿀 것.
그것들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 변화의 엔진을 몰아가는 연료가 될 수 있다면, 인간들의 삶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방식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라.
"다름"이 되어라.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의식과 "충분히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구현하라.
관찰 기술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진화의 길이며 인류의 비참한 악순환에서 벗어나 바로잡을 수 있는 도구이다.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고도로 진화한 존재와 인간들의 문화차이는 충분히 관찰하고 진실되게 교류하여라
그들은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거짓말 따위는 어리둥절한 어휘이다. 도덕같은 개념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고진재 사회는 언제나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무엇이 제기능을 하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과는 다르다.
고진재는 다른 어떤 존재나 집단이 게시한 도덕체계나 규범 사회, 영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와 "도움이 되는 것"을 그냥 관찰 함으로써 알고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나 갈등은 없고 타인에게도 서슴없이 내어준다. 삼라만상 모두의 것이며, 언제든지 "내어준 것" 보다 더 많이 창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소유와 상실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도구로서 사용 할때 삶은 단순해지고 "과정"은 칭송된다.
만사가 너희가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와 너희가 무엇을 하려하는 가?에 달려있다.
평화와 기쁨과 사랑으로 사는 것이 목표라면, 폭력은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동기만이 전부이고 목표가 결과를 결정한다. 삶은 우리의 의도에서 비롯하며 우리의 참된 의도는 행동으로 드러나며, 참된 행동을 결정하는 우리의 참된 의도이다. 삶 자체가 그러하듯 순환 그 자체이다.
고진재들은 그 순환을 보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고진재들은 항상 진실을 말하지만- 파동으로 인해 감정을 숨길 수도 없음- 인간은 진실된 신호를 자주 무시한다.
귀담아 들어라
너희가 자신과 어떤 사건의 물리적 거리 사이를 더 많이 둘수록 그 사건은 더욱이 과거속으로 물러난다. 물리적 거리는 시간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그때거기에 있으면서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너희 자신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는 시간과 공간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되리라. 그때 세상만사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에너지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창조한다.
상상은 3중의 존재인 우리의 1/3을 차지하는 마음의 기능히아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상으로 그리면 그것은 물질 현상을 취하기 마련이다. 그 상을 오래 그릴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릴수록, 그 형상은 더욱 물질이 되어간다. 우리가 부여한 에너지가 점점 커져 빛으로 폭발할 때가지 그리고 현실이라는 것으로 번쩍이며 들어날 때까지. 그러고 나면 그 상을 보고, 다시 한번 그것이 무었인지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그 순환은 반복된다. 이것이 "과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새로운 이해를 의식하면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자신의 개인영역이나 개인체험속에 대립물을 창조해서 "참된 자신과 되고자 선택하는 자신"을 알고 체험할 필요는 없다. 기억하라. 이 앎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삶을 바꿀 수 있다.
전체를 꿰뚫는 세가지 본질
1.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2. 충분히 있다.
3.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모두 하나 ㅇ기로 마음먹는 다면, 지금처럼 서로를 대우하길 그만 둘 것이고 충분히 있다고 마음 먹는다면, 모든 걸 모두와 나눌 것이며,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마음먹는 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함"을 사용길 그만 둘것이다.
따라서, 그런 문제들에 대한 체험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런 상황들 자체가 증발해 버려 존재 상태로 옮아 갈 것이고 또 그런 존재상태에서 나올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지금의 진화 단계에서 이해해야할 진리이다.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되어 있음에서 나을 때 모든 게 변하고 모든게 뒤집힌다.
거기에 있는 것은 거기에 이르는 것. 그러니 그.냥. 이르고자 하는 곳에 있어라 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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